6·25 남침전쟁 10대 미스터리의 실체
한국전쟁 68주년: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
 
서옥식 전 편집국장/정치학 박사

 

아직도 풀리지 않은 6.25전쟁 10대 미스터리의 실체

<한국전쟁 68주년 조명>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

 

전쟁 초기 왜 군은 속수무책 참패해 갔는가?

개전 초기 전투력 공백 주범은 군 내부 通敵分子

240시 기해 비상경계령 해제하고 밤늦게까지 육군참모총장 주관술파티벌여

서울 북방서 전투중인 아군에 후퇴명령 없이 한강교 조기폭파로 군민희생 막중

당시 육참총장 부관라엄광 중위는 북에서 파견된 남로당 간첩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과 국군 2개 대대 월북은 김일성의 첩자 성시백이 주도

전쟁 직전 많은 정보 빼내 북에 보내 성시백 간첩사건 연루자 112명 수사 흐지부지

 

서옥식(경남대 극동문제 연구소 초빙연구위원(정치학 박사), 전 연합뉴스 북한부장-편집국장)

   

 

25일로 ‘6.25전쟁’ 68주년을 맞는다하지만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발발한 이 전쟁에 대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불가사의: 不可思議)가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재래식 지상군 위주의 공격으로 수도 서울이 단 3일만에 점령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1950625일 새벽, 38선의 모든 전선에서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한국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않고 남침 3일 만인 628일 오전 1,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서울에 진입했다. 그리고 11시에는 중앙청을 비롯한 서울 시가지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북한군이 초기 작전에서 종횡무진으로 국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의 우세한 화력(火力)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한국군의 전쟁대비태세에 더 큰 문제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전면 남침 약 5,6일 전부터 38선에 북한군 병력들이 속속 집결함으로써 남침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일선부대의 보고를 육군 수뇌부가 묵살 한 것, 남침 하루 전인 6240시를 기해 전군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전 장병의 약 절반이 휴가와 외출·외박을 나가 거의 모든 부대가 텅텅 비어있던 것, 24일 밤 늦게까지 육군참모총장 주재로 육군 장교클럽에서 전방 사단장과 육본 작전국장 등 주요 지휘관들이 참가한 가운데 음주·가무를 곁들인 댄스파티가 열린 것 등은 도저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을 받는다.

 

6.25 전쟁 당시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2사단장이었으며, 휴전 직후인 1956년에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이형근 장군은 1993년에 출간된 그의 자서전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에서 6.25당시 육군 지휘부에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했다. 다음은 필자가 이형근 장군이 제기한 것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620일을 전후해 일선부대에서 북한 인민군 사단들이 전선 인근인 경기 연천·전곡 등에 집결하는 등 남침 징후가 있다는 정보보고를 올렸는데도 육군본부 수뇌부가 묵살 내지 무시한 점.

6.25 발발 2주전인 610일에 단행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 등 인사이동, 특히 전방 3개 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국장, 작전차장, 작전과장을 모두 교체하여 초기 작전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 사실.

전후방 부대의 교체와 함께 기관총, 대포, 수송 차량 등 주요 장비들이 남침 2주 전부터 정비를 이유로 후방에 있는 부평 기지창에 입고된 것.

611일부터 발효된 전군 비상경계령이 남침 하루를 앞둔 6240시를 기해 전격 해제된 사실

육군이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624일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및 외출·외박을 실시함으로써 전후방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부대가 텅텅 빈 사실.

624일 육군본부 장교클럽 개관식을 계기로 밤 늦게까지 채병덕 참모총장을 비롯한 전후방의 주요 지휘관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음주가무 댄스파티가 열렸으며, 일부 장교들은 파티가 끝난 후 25일 새벽에도 미리 예약된 인근 국일관 등지에서 38선이 뚫리는 줄도 모르고 2, 3차 술파티를 벌인 사실.

적의 남침 이후 수도사수 명목으로 서울 북방에 병력을 축차(逐次) 투입해 장병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한 것.

중앙방송(KBS)에서 625-27일의 국군 후퇴를 반격, 북진 중이라고 허위 보도한 것.

628일 오전 230분에 후퇴명령 없이 단행된 한강교 조기폭파로 거의 모든 군장비 등 군수품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국군과 민간인 희생이 늘어난 것.

한강교 폭파임무를 수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 집행(폭파 명령자가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으며 최 대령은 사형집행 후 1962년 유족의 재심 요청에 따라 무죄확정 판결을 받았음).

 

 

이형근 장군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전후해 일어났던 일련의 사안들은 적과 내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들이라면서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의문점들에 대한 확증을 제시할 것으로 믿으며 바로 그런 증언이야말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긴요한 일이라고 적었다. 그가 제기한 통적분자설에 대해서는 6.25전쟁사를 접해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이다.

 

실제 1950년 당시 한국군 동향과 군사력 실태는 물론이고 한국정부 내에서 이뤄지는 일들이 거의 실시간에 소련과 북한에 보고되고 있었다. 일례로, 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는 195016일 이승만 대통령 주재 하에 열렸던 국무회의에서 이 대통령과 이범석 국무총리, 신성모 국방장관 등 국무위원들의 발언내용을 128일 모스크바에 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소련 사회주의 체제 붕괴이후 공개된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의 비밀문건에서 밝혀졌다(외교통상부 사료, ‘한국전쟁 관련 소련 극비외교문서()’, 1998, pp. 45-46). 이는 남한 내부에 소련 또는 북한 동조자가 침투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당시 국무회의에서는 미국이 전쟁(북진통일)이나 평화통일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고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모든 문제를 우리가 자체로 해결해야하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한다는 신성모 장관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의 공개 문건에는 또한 김일성이 1950330일부터 4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협의하면서 남한의 군 내부에 많은 동조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며 무력통일에 자신감을 피력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 데 이 또한 통적분자가 있었다는 이형근 장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육사교수인 정창인 박사는 일찍이 이형근 장군의 지적에 동의하며,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관사에는 군적에 없는 가짜 장교가 근무하고 있었고, 신성모 장관의 친인척 중에 공산당과 연루된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형근 전 총장과 정창인 박사가 제기한 군내부의 통적분자에 대해 의문을 풀어준 사람이 있다 현대사포럼의 대표이며 6.25 전쟁사와 제주 4.3사건 연구에 정통한 이선교 목사다. 그는 20075‘6.25 한국전쟁이라는 책에서 이형근 장군이 적통분자에 속아 넘어갔다고 의심했던 인물은 채병덕 참모총장이 맞고, 뒤에서 첩자 노릇을 한 사람은 바로 총장 공관을 관리하던 부관 라엄광 중위라고 지목했다. 라엄광은 북한에서 파견한 남로당원이며, 총장공관 부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첩자 노릇을 했다. 그는 육군에 병적도, 군사영어반이나 사관학교 입교기록이나 훈련받은 기록도 없다. 그러면서도 장교복을 입고 부관 행세를 했으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628일 잠적해 버린 것으로 보아 북에서 심어놓은 간첩임이 틀림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어떤 경로로 참모총장에게 접근, 공관을 관리하는 부관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길이 없으며, 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이런 사람을 부관으로 둔 채병덕 총장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채총장이 군 지휘에 얼마나 허점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은 전쟁 발발 직후인 625일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이 소집한 국무회의에서 드러난다. 그는 적은 아마도 거물 간첩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출시키기 위한 책략에서 도발한 것 같다고 안일하게 보고하면서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결국 서울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630일 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영남편성군사령관으로 좌천됐다. 그리고 7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6.25전쟁을 앞두고 남한에 김일성의 밀명을 수행한 북한 첩자 등 북한 동조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1997526일자 북한 노동신문 특집보도에서 재확인되고 있다. ‘민족의 령수(김일성)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는 제목의 이 특집보도에는 제주4.3사건 발발 14개월 전인 1947년 초에 소위 통일혁명렬사라는 성시백이 대남공작임무를 띠고 평양에서 김일성으로부터 금시계를 선물로 받는 장면부터 서울도착 후 전개한 방대한 규모의 대남공작활동 전모가 소개돼 있다.

 

노동신문은 성시백이 괴뢰정부의 국방부, 육본 정보국, 사단사령부 와 연대-대대등 예하 부대, 헌병대, 경찰, 미군부대, 장개석의 중화민국 영사관에 이르기까지 정보조직선을 늘리고 와해공작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성시백은 또 백범 김구 선생에게 자신을 김일성 특사로 소개하며 19484월의 남북연석회의초청장을 전달해 평양으로 오도록 했고, 당시 서울에서 활동했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조직의 와해 및 방해공작을 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성시백은 서울의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중국 상해로 갔다. 그는 정향명이란 가명으로 장개석 정부에서 일했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지하활동을 했다. 그는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과 관계를 맺고 해방과 함께 1946년 부산을 통해 남한에 잠적한 뒤 북으로 건너가 김일성 직속의 대남공작임무를 띠고 남한에 파견됐다. 그는 남한에서 조선중앙일보’, ‘우리신문등의 신문사를 경영하며 취재를 이유로 정부와 군기관에서 기밀정보를 빼내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한편 언론을 국내 선전공작에 이용했다. 그는 6.25를 앞둔 1950515일 붙잡혀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27일 간첩죄로 처형됐다. 북한은 그에게 공화국 영웅 1칭호를 주고,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가묘를 만들어 놓고 있다. 1990년대 초에는 성시백의 대남공작활동 성공으로 6.25 때 미제의 침략을 분쇄했다는 내용을 담은 붉은 단풍잎이란 7부작 영화도 만들었다.

   

주목되는 것은 6.25 전야의 국회프락치사건(19495-6), 춘천에 주둔중인 제6사단 8연대 2개 대대 월북사건(194954)을 주도하고, 이승만-장개석 진해회담(194987)을 정탐해 회담 내용을 북한에 보고한 사람도 성시백이라고 노동신문이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의 경우 북한은 그동안 이승만 정부가 만들어낸 고문조작사건으로 일축해왔다. 이 같은 평가는 남한 내 친북좌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역사비평’ 1989년 가을호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은 고문에 의해 날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시백은 이승만-장개석 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던 중국대사관의 김석민을 통해 정보를 빼냈다. 그는 또한 미국대사관 직원이던 김우식을 통해 워싱턴 미 정부의 훈령과 기밀문서를 빼내 북한에 보냈다. 성시백 사건을 수사했던 반공검사 오제도는 성의 집에서 찾아낸 비밀문서를 통해 국군 2사단 정보참모 김모 소령을 체포했다. 해군 진해통제부사령관도 성시백과 내통한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성시백 사건에 연루한 사람은 모두 112명에 달했다. 하지만 수사는 6.25 발발로 중도에 끝났고 연루자 대부분은 재판을 받지 않은 채 탈옥, 월북해 구체적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6.25를 북침으로, 김현희의 KAL기 폭파도 남한의 조작으로 주장하던 북한이 해방이후 6.25전쟁 발발 시까지 추진했던 대남공작을 주모자의 이름까지 밝히며 찬양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시백의 대남공작활동 진상규명은 물론 ‘10대 미스터리가 수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치르는 20년 가까이 우리 언론에 본격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것은 그 자체가 불가사의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 같은 미스터리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육군 제6사단의 춘천대첩을 둘 수 있다. 6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전쟁 분위기를 직감해 병사들의 외출·외박을 시행하지 않고 오히려 38선 경계를 강화했다. 그 결과 다른 곳은 다 뚫렸어도 춘천 지역은 3일 동안이나 버티어 냈다. 개전 초기에 북한군의 침략을 막아내고 초전에 승리한 유일한 전투였다. 북한군은 초기 춘천전투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김무정 중장을 임명했다. 또한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 소장으로, 7사단장전우 소장을 최충국 소장으로 각각 교체하는 등 패전의 오욕을 씻으려 안간힘을 기울였다.

 

물론 ‘10대 미스터리제기로 국군을 사흘만에 서울을 적에게 내준 무기력한 군대로 내몰고, 군 수뇌부를 지휘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력의 절반을 희생시킨 무능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싸운 많은 국군 장병에게 예의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왕조나 국가의 쇠망에는 거의 언제나 내부의 적에 의한 분열, 그리고 이로 인한 국력 약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을 것이다.

 

1940년 프랑스가 4주 만에 히틀러의 탱크와 전투기에 무참히 무너진 것, 1949년 미국제 신무기로 무장한 400만의 장제스 군대가 마오쩌둥 군대에 총 한방 쏴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기며 대만으로 쫓겨난 것, 1975년 세계 제4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월남이 전투기는 물론이고 변변한 소총 한 자루 없는 공산 월맹에 패망한 데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내부의 첩자들이 적과 내통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이후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다.

 

독일 통일과 동서 냉전체제 해체의 결정적인 공헌자인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1974년 비서로 근무하던 귄터 기욤이 동독에 서독 국가기밀을 빼돌린 이적혐의가 인정돼 간첩을 부하로 둔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프랑스의 국방장관이었던 샤를 에르뉘는 소련의 비밀경찰(KGB) 등 동구 공산권 첩보기관을 위해 일해온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10여년 뒤인 1996년에 폭로됐다.

 

196793일 실시돤 월남(남베트남)선거에서 야당 후보 쭝딘쥬는 선거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며 반미반전 선동으로 감상적 민족주의에 젖은 대중의 인기를 끌어 2위를 했다. 하지만 그는 1975년 월남 패망 후 공산월맹의 간첩이었음이 밝혀졌다.

 

아놀드 토인비는 국가의 멸망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시작 된다고 했다. 내부의 적을 더 경계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남남갈등과 함께 체제전복을 시도하는 내부의 적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기사입력: 2018/06/20 [19:49]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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