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軍, 문화재청에 해인사 기록수정 요청
경찰요청으로 金英煥 대령이 '해인사 폭격'에 출동
 
조갑제 대표
문화재청이 작년에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이야기'는 張志良 전 공군참모총장이 미군의 폭격명령을 용감하게 거부하여 해인사를 지켜냈다고 소개하였다.
 
 오마이 뉴스에 실린 이 책의 요지는 이렇다.
 
 <1951년 8월에 경남 사천에서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던 장지량에게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 공군작전본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당시 600명 가량의 인민군 1개 대대가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었다. 장지량은 고민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한 장군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도 있지 않은가. 팔만대장경이 어떤 문화재인데 인민군 몇 명 잡자고 해인사를 폭격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명령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해인사를 지킬 것인가."
 
 그는 폭격명령을 거부하기로 하고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어 출격의 때를 놓친다. 그 후 인민군이 철수할 때를 기다려 공격을 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지량이 명령을 어긴 것을 항의, 이승만은 사살 명령을 내린다.>
 
 그 전에 나온 張志良씨의 회고록을 근거로 한 이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여 尹應烈 전 작전사령관 등 참전 공군 장교들이 異義를 제기하였고, 공군은 최근 자체 조사를 통하여 미군이 해인사 폭격을 명령하였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 문화재청에 문제의 책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하였음이 밝혀졌다. 공군에선 해인사를 지킨 사람은 金英煥 대령이며, 그는 미군이 아니라 경찰의 긴급항공지원 요청을 받고 출격하였다고 밝혔다. 金 대령은 사천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제1전투비행단 소속 제10전투비행전대의 戰隊長이었다. 공군은, 해인사 사건 당시 미군이 후방의 공비소탕에 대한 한국 공군의 작전에 대하여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고 한다. 공군본부가 문화재청에 보낸 수정안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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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출간,「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이야기」
 - 김영환 대령, 고려대장경판을 지키다.(205-211쪽)
 
 김영환1) 대령, 영단(英斷)으로 고려대장경판 지키다.
 
  경상남도 합천 가야산 기슭에 자리한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인 802년 창건되었고, 고려대장경판(흔히 ‘팔만대장경판’이라 부름. 국보 제32호,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고려시대에 제작되어 강화도에 보관되어 온 고려대장경판이 조선 초기 이곳 해인사로 옮겨온 것은 해인사가 외적의 침입이 미치기 어려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을 당하였을 때에도 해인사는 의병과 승병들에 의해 지켜졌고, 임진왜란 이후 무려 일곱 차례에 이르는 화재를 당하면서도 고려대장경판과 장경판전만은 화마를 모두 피했습니다. 이렇듯 소중히 지켜온 문화유산이지만, 하마터면 한 줌의 재로 변할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때입니다. 1951년 7월말 무렵 지리산 및 가야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후방에 남아 있던 북한군과 국군의 밀고 당기는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경찰전투부대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중심이 된 지리산 및 가야산 일대의 무장공비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공군에 작전지원을 요청합니다. 하여 지리산 및 가야산 일대에서는 공군 전투기가 동원된 폭격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습니다. 1951년 8월부터 9월까지 이 임무를 맡은 부대가 사천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제1전투비행단 소속 제10전투비행전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처 퇴각하지 못하고 낙오한 북한군 900여 명이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로 모여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해인사와 사찰에서 보존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도 일촉즉발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공군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이자 제10전투비행전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경찰전투부대로부터 긴급항공지원 요청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김영환 대령이 직접 4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편대장으로 출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출격하는 전투기에는 기관총과 폭탄, 로켓탄 등 막강한 무장을 하고 있어 1개 편대로 해인사를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해인사에 숨어있는 북한군을 소탕하기 위해 기지를 이륙한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 상공에 이를 때까지 적군 소탕만을 고심한 나머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에 관해 미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지난날 불심이 돈독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 고려대장경판이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세계적 보물이라는 주지스님의 말씀이 김영환 대령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내가 만일 이 보물이 보관된 곳에 숨어 있는 적군을 공격하면 적군은 소탕되겠지만 세계적 유산이자 국보인 고려대장경판도 완전히 소실되고 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2) 그는 공격태세를 취소하고 해인사 상공으로 급상승하면서 부하들에게 해인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긴급명령을 내린 뒤 해인사 상공을 몇 차례 선회한 다음 해인사 뒷산에 위치한 적군의 집결지와 보급품저장소로 보이는 지점을 공격하고 기지로 귀환하였습니다. 이로써 해인사는 잿더미가 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2002년에는 해인사 들목에 고려대장경판을 본떠 만든 매우 독특한 형상의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목숨을 걸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1954년 1월 준장으로 진급)의 업적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입니다.

  한 가지 더,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은 김영환 대령이 전쟁 당시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김영환 대령은 초대 공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김정렬 장군의 친동생으로 공군을 창설한 7인 간부 가운데 한명이기도 합니다.

  전쟁 중이던 1951년도 어느 날 김영환 대령은 형님 집을 방문했다가 형수가 입은 빨간 치마 색깔이 너무 좋아 형수에게 치마색과 같은 빨간 머플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매고 다닌 것이 공군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김영환 대령이 공군인들 사이에 우상이 되었을 정도로 멋진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일화가 아닐까요?
 
 * 1954년 3월, 사천비행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영환 장군은 항공기를 타고 강릉기지로 이동하던 중 악천후 속에 실종돼, 순직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1) 김영환(金英煥) 1921. 1. 8 서울 생, 1948. 5. 14 군 입대, 1954. 3. 5 순직, 제10전투비행전대장, 강릉기지사령관, 제10전투비행단장. 제1훈련비행단장을 역임.
 
 2)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張志良)의 회고록에 따르면, 장지량은 당시 작전참모로서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았으나,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하여 당시 김영환 전대장과 의기투합하여 명령 이행을 지체하다가 인민군이 해인사를 빠져나가 깊은 산중에 이르자 대대적인 폭격작전을 감행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공군측에 확인한 결과 “당시 장지량 중령이 작전참모로서 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에게 해인사 폭격 중지를 건의했을 개연성은 있으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진술이나 자료를 찾을 수는 없다”고 한다. [조갑제 대표: http://www.chogabje.com/]
기사입력: 2009/11/16 [21:08]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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